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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수 칼럼

가족이라는 불공정거래에 관하여 [정기수 칼럼]

[신세기 정기수 칼럼]

시장 자유주의가 세상을 지배한 이래 사람들은 불공정거래에 대한 감시와 재제를 강화해왔습니다. 하지만 쉽게 뿌리 뽑히진 않죠.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원래 세상이란 것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야기 할 것은 시장에서의 불공정거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 모두가 속해있는 가장 작지만 세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가족, 그 가족이란 이름 하에 이루어지는 불공정거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가족에 관한, 불편하지만 해야 할 이야기

가족과 불공정거래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배열에 시작도 하기 전에 거부감을 느끼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고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동안 생존을 위해서 끊임없이 가족이란 것에 대한 도덕적 개념과, 이데올로기를 주입 당해 왔으니까요. 모든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 저가 글을 쓰는 기본적 태도이지만 오늘은 아닙니다. 보기 싫은 분은 안보셔도 됩니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매우 단순하고 논리적인 이야기이지만 보기에 따라 매우 불쾌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은 불공정거래다.’

결론부터 말하겠습니다. 가족이란 공동체는 불공정거래의 집합체입니다. 가족은 불합리한 거래이고 관계이고 계약입니다. 가족이라는 이름 하에 아버지는 필요이상의 희생과 책임과 대가를 지불해야 하고 어머니 또한 희생과 포기와 노동을 지불해야 하며 자녀는 원치 않은 인생을 부여 받고 양육에 대한 대상자로서 강요당하는 수많은 제재 속에 살아야 합니다. 거기다 이런 가족의 유지를 위해 서로에게 강요하는 사랑, 관심, 배려, 가치관 개조 등은 이루 말할 것도 없이 강력합니다. 저는 항상 완전한 이론, 진실, 주장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무조건적으로 가족이란 것이 불공정거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지금부터 불공정거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가족의 시작과 불공정거래의 발생

시대의 변화 가족의 변화

가족이란 개념이 어떻게 생겼을까요? 처음부터 가족이란 말이 있었을까요? 처음에는 씨족으로 얽힌 공동체, 부족 개념이었지요 그때는 분명 공동체 생활이 가져다 주는 이점이 생존에 더 유리했습니다. 사냥이나, 침략에 대한 방어, 후손의 양육까지 말이죠. 지금도 아마존에 사는 원시부족 형태의 사람들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후 사회 시스템이 발전하여 농경생활로 접어들면서 생명 유지를 위한 수단이 사냥에서 농업이라는 형태로 변형되며 이 공동체는 변화되어 더 작아지고 지금과 비슷하지만 더 강한 결속과 조금 더 큰 혈육집단으로서의 가족이라는 형태를 띄게 됩니다.

 

물론 큰 사회적 시스템인 국가라는 개념은 강화되고 커졌지만 역설적으로 국가가 가져가는 기능적 역할(부족의 안전, 전쟁, 공용 시스템 유지를 위한 부분) 만큼을 뺀 나머지 기능을 위해 소규모 공동체 역할은 작아지고 특화되어 변화해갔습니다. 역시나 농업사회까지는 가족이라는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저마다 역할이 분명하고 비교적 공정한 거래가 이루어졌습니다. 아버지는 농사의 경험을 통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운영을 하고 아내는 그 외 백업할 수 있는 생활에 전반에 걸친 관리 역할을 분담했습니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젊은 노동력을 제공하였고 결혼이라는 것을 통해 다시 소규모 생산 시스템을 구축하게 되었지요. 농경 시대는 그 속에 깊은 문화적 갈등이나 성차별이나 그런 것은 일단 거시적 차원에서 배제하고 봤을 때 나름의 공정한 거래가 이루어졌습니다. 공동체의 결속 이유가 있고, 그들은 서로 주고 받는 것이 명확했습니다.... 문제는 산업혁명 이후 디지털 시대까지 이어져 오면서 발생합니다.

 

머릿수가 곧 생산력 향상이라는 공식이 성립했던 농경사회에서 디지털로 변화하는 사이 당연히 효율성을 바탕으로 가족의 핵가족화가 진행됩니다. 노동은 집단이 아닌 개인의 노동으로 변하고 생활은 기계로 대체되고 서비스상품이란 명목 하에 아웃소싱됩니다. 교육은 사회적 시스템에 의해 학교에서, 학원에서 이루어지고 (다는 아니지만요) 안전, 자기보호에 대한 역할은 사회 안전망 시스템으로 귀속되고 강제성도 띄게 되었습니다. 문화는 어떻습니까 이미 개인의 문화만 남을 뿐 혈연 집단의 문화는 계속해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문제가 아니고 시대의 흐름이, 시스템이 그러하기 때문에 당연한 것입니다.

 

다시, 가족의 불공정거래에 대하여

가족의 불공정거래 2

노동 생산성, 생산 수단, 안전, 교육, 생활 노동, 문화... 이중에 개인화 혹은 개인을 위한 시스템으로 발전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생각해봅시다. 가족이란 이 소규모 공동체를 유지하는, 사라지지 않고 버티는 버팀목은 무엇일까요?

'휴머니즘'

실체가 없는 도덕적, 철학적, 사상적 관념을 통칭 휴머니즘이라고 표현하겠습니다. 인간으로서 존재의 가치를 부여하기 위한 휴머니즘적 가치 부여 이외에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버티는 버팀목은 사실상 상실한 상태입니다.

 

지금의 아버지란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가족을 위해 경제적 활동을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를 지고 아내를 위해야 하고 보육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합니다.

 

아내와 아이의 존경이 존재합니까? 존재하든 안 하든 의무는 다해야 합니다. 뼈빠지게 일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지만 아이에게 소흘 하단 소리를 듣고 또, 아이가 사춘기에 반항을 하고 아버지를 생깐다면 그건 ‘아버지가 소흘 했던 것에 대해 적금 타는 것’이란 소리를 들을 뿐입니다. 끊임없이 열심히 일하고 서비스하고... 하지만 의무에 대한 요구 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족의 구성원들이 농경사회처럼 아버지란 사람들의 생산력을 더합니까? 아이가 커서 부모를 위해 모시며 사는 것이 당연해서 노후를 걱정 없이 맞이합니까? 아니면 예전처럼 권위라는 것이라도 존재합니까? 실질적으로는 의무 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머니란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싫든 좋든 아이를 낳는 것, 그리고 가장 밑바닥에 근간을 이루는 있는 양육 역할은 그들의 몫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단절되는 삶, 개인의 욕망과 욕구는 거세를 당합니다. 어머니란 이유로 무조건적인 희생, 무조건적인 사랑을 강요 받습니다. 자식을 양육한다고 해서 끝입니까? 또다시 손자 손녀를 봐달란 아주 이기적인 요구만을 할 뿐 자식은 독립 이후 어머니에게 아무런 보상을 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어떻습니까?

요즘 아이들은 좋은 시대에 태어나 받고만 자라니 좋다구요? 그들은 부모에게 교육을 강제로 받아야 하고 너무나 많은 재제를 당하며 살고 있습니다. 독립을 해야 한다는 부담과 함께 다시 시간이 지나 그들이 성인이 되면 지금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의무만을 져야 하고 자신처럼 자식에게 아무것도 바랄 것 없이 의무만 지게 됨으로 역시나 지금의 부모와 같은 부당거래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이들은 양육의 대상으로서 가족의 구성원 중 유일하게 받으며 살지 않냐고 말하신다면...그것이 가장 큰 오류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그들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닙니다. 그들은 태어나게 해달라고 한적이 없습니다. 100% 부모가 원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강제로 태어나게 한 부모가 양육을 하는 것은 그들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입니다.

 

가족의 붕괴를 막고 있는 것

지금의 가족, 이 부당거래 속에 그나마 붕괴를 막고 있는 가장 강력한 구속력은 사실 출산과 육아입니다, 하지만 국가의 시스템이 발전하면 할수록 그 역할은 가족에서 사회로 이양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모든 양육과 교육을 맡았던 가족 내에서의 양육은 현대에 와서는 많은 부분이 사회 시스템으로 이양됐습니다.

 

그럼에도 부당거래에 지친 이들이 출산을 거부하니 인구의 감소는 막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젠 교육을 넘어서 출산 장려금을 주는 실정입니다. 그나마 아직은 출산이란 것이 사람을 통해서만 가능하니 그렇지 과학 기술의 발전은 분명 출산에 대한 부분까지 대체할 것입니다.

 

시험관 아이가 신기하던 시대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이제 DNA 복제를 이야기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체외 수정을 지나 인간을 창조하는 시대, 개인이 아닌 국가가 인구를 조절하는 시대가 오는 것은 예상하기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씁쓸하게도 공산 과학영화에서 인간 창조 시스템을 보는 것이 익숙해져 버린 ‘오늘’ 입니다.

 

가족의 불공정거래 속 휴머니즘

지금의 가족이라는 것은 현실적 기능과 역할에 있어 축소에 축소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가족 구성원간에는 의무가 부가될 뿐 되돌아오는 Benefit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은 휴머니즘에 입각한 관념밖에 남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이기에 인간다움이란 정체성을, 특별함을 유지하기 위해 관념적 끈 하나를 끝까지 부여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 칼람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가족이란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이런 불공정거래가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 흐름 속에 불공정거래를 양산하는 이 가족 시스템의 변화 속에 그럼에도 가족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와 해법은 무엇인가’ 입니다.

 

 

불공정거래가 발생하는 이유

가족이란 공동체 속에 불공정거래가 양산되는 이유는 매우 간단합니다. 사회적 시스템에 있어 개인화를 부추기는 경제, 과학, 사회 시스템은 발전해나가는데 비해 가족을 유지하기 위한 시스템은 턱없이 부족하고 발전이 없어 개인화와 가족 시스템 사이에 불균형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 불균형이 커질수록 그 불균형을 메우기 위한 불공정거래는 커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가족이 필요한 이유

국가는 공동체 사회라기 보다는 시스템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느낄 수 있는 공동체라고 보기엔 너무나 크고 공적인 차가운 시스템인 것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나와 너를 느껴야 하고 유대감과 커뮤니케이션을 끊임없이 하고 싶어하고 그것이 없이는 사실상 정체성을 유지하거나 온전한 정신체계를 유지하기 힘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남은 가족이란 공동체는 붕괴가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인간의 엉뚱한 실수와 불합리한 생각들이 문제가 되고 있지만 아마도 머지않아 가족의 붕괴로 인해 모든 인간이 국가란 시스템에 의해 양산되고 통제되는 사회에서는 인간성 실종에 대한 부분이 가장 문제가 될 것입니다.

 

 

불공정거래에 지친 우리 가족들의 복귀를 위해

가족의 구성원들이 느끼는 불공정거래 부담감을 줄여주는 것이 현재로써 가족의 붕괴를 막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여기서 서로 사랑하자 따위 말을 하고 싶지는 않네요) 아버지에게는 육아를 위한 경제적 부담에 대한 불공정거래를 해소해야 하며 어머니에게는 육아에 대한 막대한 시간, 정신적, 육체적 부담을 현저히 줄이고 특히 경력 단절 및 육아 휴직에 대한 시스템적 지원이 지금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 확대, 강화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아이들을 위한 대책을 말하고 싶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부모가 아닌 아이에 대한 간섭과 시스템의 투입은 너무 많이 이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기다 아이가 태어나는 가장 시급한 문제, 그리고 자라면서 맞아야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부모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차피 아이가 진짜 맞이해야 할 성장 후의 문제도 결국 지금의 부모들의 불공정거래 해소가 답이기 때문입니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 사회 복지 예산 지출 이야기가 많습니다만 가장 큰 문제, 가장 큰 재정을 투입해야 하는 부분은 양육을 위한 지원 시스템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현 시대 부모들이 짊어지고 있는 불공정거래를 줄여주지 않으면 가족도 우리의 미래도 없습니다.

육아로 인한 수입, 경력 단절에 대한 부분을 위해 그 얼마를 투입해도 모자라지 않습니다. 지지율 눈치 보며 뭐라도 해보자는 식의 임시 공공근로자에게 예산 퍼부을 때가 아니란 이야기입니다.

 

가족, 불공정거래의 시대 끝맺음

우리는 싫든 좋든 가족을 이루고 사는데 있어 불공정거래를 강요 받을 수밖에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괴로워하고 걱정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필요한 존재이기에 이런 불공정거래도 감수하며 살아가는 것이겠지요. 그렇기에 우리는 이런 불공정거래에 대한 데미지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노력의 바탕에는 서로의 불공정거래에 대한 이해와 인정이 있어야겠지요. 서로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인정을 해주지 않으면 다음 해결책을 이야기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족은 불공정거래임에도 거래를 할 수 밖에 없는 가치를 가졌으니까요”

 

[정기수 칼럼‘가족, 그 불공정거래에 관하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