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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수 칼럼

이봉창 의사 의거 스토리 (그의 생애와 역사적 의의)

이봉창 의사 스토리

이봉창 스토리: 이봉창 의사의 재조명, 잘 되고 있는 건가?

이봉창 의사를 아십니까? 우리나라는  매우 강력한 주입식 교육을 통해 거의 동일한 역사 지식 및 역사관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툭! 치면서 김구 선생을 이야기하면 맨주먹으로 뭘 때려잡았느니 상해 임시정부니 하면서 바로 바로 이야기가 술술 튀어나옵니다. 그것도 10명을 치면 10명 다 거의 똑 같은 내용을 외워서 말하듯이 말을 합니다.

 

그런 반면에 중요시 되는 사건 및 인물 이외의 역사에 대한 지식은 전반적으로 아주 낮은 편입니다. 왜 그럴까요? 저의 생각으로는 우리나라 역사교육이 획일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어떠한 부분은 너무나 똑 같은 내용으로 귀에 못이 박히듯 들었고 어떤 부분은 듣지 못해서 인지도가 너무나 낮은 것입니다.

 

이봉창 스토리: 미디어에서 본 이봉창 의사 스토리

오늘 TV를 켰습니다. TV에서 이봉창 의사 의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도 TV에서 역사적 사건 및 인물에 대한 다양한 조명을 한다는 것은 다행스런 일입니다. 그런데 내용을 보니 여전히 걱정스럽습니다.  TV에서는 마치 이봉창 의사의 의거 이전 생활이 애국과는 정 반대의 생활이었다고 양념을 칩니다. 모던보이니, 일본인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랬다는 둥...양념을 쳐도 너무 친듯합니다.

 

물론 그의 행적이 기록에서 이렇다 할 애국 청년으로서의 기록이 없고 거기다 일본에서 일을 하며 일본 이름을 가지고 생활한데다 목숨을 바치는 투탄 의거를 할 만한 복선이 없다는 것은 인정합니다만 그가 신민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노력했다고 말하며 그 부분을 오락적 요소로 다뤄버리는 것을 보고 뜨헉 했습니다.

 

게스트로 윤봉길 의사의 조카까지 나와서 그렇게 말해버리니 그 방송을 본 사람들에게 이봉창 의사는 요상한 인물이 되어버린 겁니다. 역사를 대하는 태도, 역사관은 이렇게나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명확한 사실, 자료가 있는 것들은 그나마 다행인데 그렇지 않은 불투명한 것들은 역사관에 따라 너무나 다르게 재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봉창 의사에 대한 기록이 다소 불투명하다, 이러한 의거를 하기까지의 수긍 할 만한 계기나 그의 명확한 민족 의식이 기록엔 없다.’ 정도에서 끝날 이야기를 이렇게 재밋거리로 사용해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이봉창 의사에 대해 한번 자료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저 또한 여기저기 찾아봤지만 그의 이런 행보에 대해 뒷받침할만한 명확한 자료가 부족하긴 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역사 설명들을 보고 느낀 것은 해석이 모두 재 각각이었다는 것입니다. 모두다 각자의 사관에 따라 그 빈 자리를 채우고 있는 듯 했습니다. 

 

역사를 하나씩 배울 때마다 드는 생각인데

‘역사관은 역사의 빈 기록을 채우는 또 다른 역사 기록’ 이란 생각이 듭니다. 사설이 길었네요

 

이봉창 스토리: 이봉창 의사의 의거 전 스토리

이봉창 의사는 1900년 8월 10일 경성부 용산방 원정2정목에서 태어났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아버지인 이진규씨는 농업을 하며 중류층의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김구의 ‘도왜실기’에는 이봉창 아버지의 토지가 철도건설 라인 근처에 있다는 이유로 땅을 일본에게 강제로 빼앗기고 생계가 어려워 서울로 가족을 이끌고 상경했다고 기록되어있는데 이 부분은 의거를 함께한 동지에 대한 백범의 사견이 실려있다는 썰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는 아버지의 방탕한 생활로 인해 가계가 기울고 소학교도 어렵게 졸업했다고 전해집니다. 그 이후 그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과자점, 철도 견습생 생활 등을 하며 지냈고 10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나는 역사의 한 복판에서도 크게 동요하지 않고 독립에 대한 뚜렷한 민족의식도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던 중 1925년 일본으로 자신의 조카딸인 이은임과 함께 일본으로 넘어가서 본격적인 일본 생활에 접어듭니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그닥 모범적이지도 않고 술과 여자 내용도 있으며 일을 열심히 하지도 않았습니다. 좋게 말하면 자유스러운 삶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희망 없이 살았습니다. 글쎄요 기록에 어찌 나와있던 한국인이 그 당시 일본에서 줄도 빽도 없이 뭐 얼마나 희망에 차서 살 수 있었겠습니까.

 

 

일본에서의 생활에서 눈 여겨 볼 것은 두 가지 입니다.

첫 번째는 그가 일본어를 잘했고 일본인 흉내를 내며 일본인 속에 섞여 살려 노력했다는 것

두 번째는 그런 와중에 1928년 일본 천황 히로히토 즉위식을 구경하러 갔다가 한글 편지를 갖고 있었다는 이유로 교토 고조 경찰서에 체포되어 한인이란 이유만으로 11일동안 투옥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을 그의 애국 의거를 향한 심경의 전환 포인트가 아니었겠는가 하는 해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철도 견습생활을 포함한 인본인과의 차별 대우를 받았던 것도 일본에 대한 생각을 바꾼 원인이 아니겠느냐는 해석도 있지만 글쎄요 한인에 대한 차별은 그당시 너무 일반화된 현상이었을 텐데 그것 가지고는 터닝 포인트가 되기 힘들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합니다.

 

 

이봉창 스토리: 백범과의 만남

이봉창 백범 윤봉길

1931년 이봉창은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을 만나게 되고 그를 통해 임시정부 통신처의 위치를 알게 됩니다. 그리곤 그냥 들이대며 쳐들어갔다죠. (그렇다기보단 가는 여정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임시정부 사람들은 듣보잡인 이봉창을 매우 의심스럽고 어처구니 없이 바라봤다고 합니다.

 

하지만 백범만은 그런 그를 알아봤다고 하는데 글쎄요 이것도 참 미화....기름칠이 된 것 같긴 합니다만 아무튼 그에 대한 오해가 풀리고 김구는 이봉창을 믿게 됐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한인애국단으로서 활동을 하게 되었고 우리가 아는 이봉창의 폭탄 의거 활동까지 연결이 됩니다.

 

이봉창 스토리: 이봉창 의사의 의거가 갖는 역사적 역할과 의미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한인애국단 활동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게 되는구나, 이러한 활동이 외교적으로도 반향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고 그 이후 한인애국단의 활동이 탄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봉창의 의거는 비록 실패했지만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뒤 따랐고 그것으로 인해서 앞이 캄캄한 침체기였던 임시정부는 외부에 이름을 제대로 알릴 수 있었고 교민단체의 지원을 받아 자금줄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뒤 이어 당시 중국의 국민당 총통 장제스의 임시정부 지원이 시작됐고 그 지원 중 하나로 훗날 한국광복군의 전신이 된 인물들을 키우게 된 낙양군관학교의 한인분교 설립까지 임시정부, 독립운동의 역사적 맥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완전히 개인적 의견

여기서부터는 그냥 정말 정말 개인적 생각입니다. 요즘 들어 영화, 방송, 언론, 또 다양한 기관에서 역사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르고 있던, 혹은 잊고 있던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들을 다시 한번 배우고 생각해볼 기회가 잦아졌습니다. 그런데 뭔가 의문이 드는 것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 궁금증

- 정말, 목숨을 건 이러한 의거 활동에 젊은 그들은 온전히 그런 의지를 가지고 처음부터 참여했을까?

- 한인애국단이란... 그 젊은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숭고한 사람, 숭고한 정신, 숭고한 의지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었을까? - 그들의 인간적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우리가 접하는 것들은 그들의 숭고한 의지와 애국적인 사명, 민족 해방의 열망들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 말고는 들을 수 없으니까요. 윤봉길 의사가 두 아들에게 남긴 편지의 너무나 무거운 애국 정신만 볼 수 있을 뿐 그 이전 윤봉길 의사의 인간적 고뇌라는 것은 완전히 제거된 이야기들로 인해 어쩌면 우리는 상징만을 배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누가 무엇을 위해 만든 상징인지 우리는 너무 많은, 너무 완벽한 상징들에 깔려 아무런 다른 생각을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집니다.

 

두 번째 궁금증

- 백범 김구 선생이 알아본 것인가...?

- 목숨받친 이들은 정말 모두 권유 없이 스스로 선택 것인가?

- 진짜 현장에서의 이야기는 어떤 상황 어떤 이야기들이 존재할까?

이것은 아마도 끝까지 알 수 없겠죠 그러나 궁금합니다. 할 수 있다면 타임머신을 타고 그 때 그곳에 가서 보고 싶네요

 

세 번째 궁금증

- 왜 요즘 역사적 이슈가 많아지는가? 왜 지금?

- 왜 6.25 이전의 독립 운동 역사에 집중되는 듯한 느낌이 드는가?

- 과연 이것은 순수한 역사의 재조명인가?

특별히 저 질문들에 대한 코멘트는 하지 않겠습니다만 개인적으로 역사는 최대한 순수하게 다뤄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번 정기수 역사 스토리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에 또 뵈요~